문헌록 전자족보(대동보) > 문헌록
           
1. 문헌 목록 〉17. 17世 〉11. <부정공>첨지공휘현보유사(僉知公諱顯普遺事)
1. 문헌 목록 〉17. 17世 〉13. <부정공>사복시정공휘정직가장(司僕寺正公諱廷直家狀)
1. 문헌 목록 > 17. 17世 >  
12.<부정공>학생공휘정인행록(學生公諱廷仁行錄)
學生公諱廷仁行錄 府君姓趙氏諱廷仁字仁彦玉川世家自農隱虔谷先生井邑泰仁縣監至奉事公諱珏通德郞公諱義吉五世以上也高祖諱時耈曾祖諱維春祖諱光耘考諱重命妣金海金氏斗彦女 英廟乙酉十二月二十二日府君生性本寬仁行篤孝友言燒不妄動止有常儉以養德恕以容物自做秀才時有父兄子弟能世其家之稱奘焉二十二歲丁外憂叩呌擗踊殯葬祥禫一從禮制服闋後母夫人與伯兄丘嫂爲營析箸優施襟分固辭其田廬婢僕之優良曰屢世宗家每以量入爲出而常患所入之未治於爲出也我奚以優品爲哉只取糊口容膝助耕助織之可及者以資産業基地恒切痛恨於只被父恩不能以巳力忠養推竭誠於慈闈晨昏定省夏扇冬被莫不備摯甚愛從子昆仲之以文行見稱於士友爲助講學之資曰家戶之望孰有加於子姪之攻學勤謹哉母夫人春秋至七十有四尙享康寧是歲二月中旬偶有不安節深加憂悶行禱合藥無誠不殫竟以三月初六日見背哭踊盡哀至衣襟棺槨之具協謀于兄主與嫂氏必致恔心踰月以葬日省于墓不以暑雨風雪有廢人稱其孝每當忌辰前期致齋誠敬將事痛如袒括以至傍人動涕矣待夫人旣和且敬敎子旣慈且嚴家道雍睦焉癸酉六月十八日考終享年四十九初葬蘆洞山下麓甲坐原遷合兆于大光洞長谷夫人塋艮坐原夫人淳昌薛氏世蔓女文良公恭儉后生先公一年甲申十月三日卒后公三年乙亥三月二十日享年五十二育三男二女男長德祥次河祥季玉祥女適陽川許芢洪州宋廷琦長房早夭無育次房四男二女永燦永振壽階通政永寶永喜原州金鳳汶光山盧永鎭妻季房二男三女永喆永裕慶州金昌鎬平澤林魯禧慶州李某妻曾孫承根監察鍾根錦城羅鳳煥原州金洪耽津崔玉妻永璨出滿根都事東根在根壽根昌根洪根永振出尙根文根演根孝義見稱光山金相冕妻永寶出奎根聖根木川張台烈妻永喜出秉根慶根陽城李某淸州韓元敎妻永喆出明根平山申奉祚妻永裕出嗚呼府君之壽不稱德實不能無憾於有德必得年之天也府君素履四德之正六行之篤曾大父垂訓於大父大父垂訓於先考先考垂訓於不肖不肖竊恐愈久而失其傳謹述如此俾作來裔之世訓焉 孝玄孫 炳瓓 謹述 학생공휘정인행록(學生公諱廷仁行錄) 부군의 성은 조씨요, 휘는 정인(廷仁)이며, 자는 인언(仁彦)으로 옥천 세가이다. 농은(農隱)·건곡(虔谷)선생으로부터 정읍(井邑)·태인(泰仁)현감 봉사공 휘 각(珏), 통덕랑 공 휘 의길(義吉)이 五세 이상이요, 고조 휘 시구(時耈) 증조 휘 유춘(維春) 조 휘 광운(光耘)이고, 비는 김해김씨 두언(斗彦)의 딸이다. 영조(英祖) 을유년(一七六○) 十二월 二十二일에 부군이 태어났는데 성품이 본래 너그럽고 어질며, 행의가 효우에 독실하여 말과 웃음을 망령되게 하지 않고, 움직이고 그침이 법도가 있으며, 검약으로써 덕을 기르고 인(仁)함으로써 사물을 용납하여 스스로 수재(秀才)가 되니 부형 자제가 능히 집을 이을만 하다고 칭찬하였다. 二十二세 때에 부친상을 당하여 땅을 치고 부르짖으며 가슴을 치고 뛰며 빈염 장사 소대상 담제(殯葬祥禫) 일체를 예제에 따라 행하였다. 그리고 후에 모친이 큰형 내외와 더불어 분재(分財)하면서 자기 부분 외에 넉넉히 나누어 주니, 그 중에 가목과 전답 및 건장한 비복을 굳이 사양하여 가로되 「여러대 종가에서 매양 수입을 헤아려 지출할 것이요 항상 수입이 지출보다 적은 것이 근심이니 내 어찌 좋은 물품을 가져 가겠는가」 하고 다만 먹을 것 약간과 작은 집 한칸의 재산만 받았다. 항상 부모의 은혜만 입고 자기 힘으로 지성껏 봉양하지 못한 것을 통탄하였다. 미루어 정성을 모친에게 다하여 아침 저녁으로 문후를 살피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고 겨울에 따스하게 갖추어 이르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여러 조카들의 문학과 행의가 사우(師友)간에 칭송이 자자하므로 강학할 자금을 보조하며 말하되 「문호의 희망이 자질의 공부 잘한것보다 무엇이 더한 것이 있으리요」 하였다. 모친의 춘추가 七十四세인데도 오히려 강녕하더니, 이해 二월 중순에 우연히 편안하지 못한 증후가 있으므로 깊이 근심하여 기도하고 약을 서서 정성을 다 했지만 마침내 三월 六일에 별세하니, 울고 뛰며 슬퍼하였고 수의와 관곽의 기구를 형 내외와 협의하여 거행하였다. 달을 넘겨 안장하고 서우풍설(暑雨風雪)에도 하루도 성묘를 폐한 일이 없으니 사람들이 그 효도를 칭송하였다. 매양 제삿날을 당하면 먼저 재계하고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며 초상 때와 같이 슬퍼하여 곁에 있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부인을 화경(和敬)으로 대접하고 자손 교육을 자애롭고 엄하게 하니 가내가 화목하였다. 계유년 六월 十八일에 춘추 四十九세로 별세하니, 처음에 노동산 하록 갑좌원에 장사하였다가 뒤에 옮겨 대광동 장곡 부인 묘소 간좌원에 합봉하였다. 부인은 순창설씨(淳昌薛氏) 세만(世蔓)의 딸이요, 문량공 공검의 후손인데 공보다 一년 먼저 갑신년 十월 三일에 태어나 공보다 三년 뒤인 을해년 三월 二十일에 향년 五十二세로 별세하였다. 남은 덕상(德祥)·하상(河祥)·옥상(玉祥)이요, 녀는 양천(陽川) 허인(許芢), 홍주(洪州) 송정기(宋廷琦)의 처였다. 장방은 일찍 죽어 아들이 없고, 차 방남 영찬(永燦)·영진(永振)은 수직으로 통정이요, 영보(永寶)·영희(永喜)며 원주 김봉민(金鳳汶), 광산 노영진(盧永鎭)의 처이고, 계방 남은 영철(永喆)·영유(永裕)요, 녀는 경주 김창호(金昌鎬), 평택 임노희(林魯禧)의 처였다. 증손 감찰 승근(承根)·종근(鍾根)·금성(錦城) 나봉환(羅鳳煥), 원주 김홍(金洪), 탐진(耽津) 최옥(崔玉)처는 영찬출이요, 도사 만근(滿根)·동근(東根)·재근(在根)·수근(壽根)·창근(昌根)·홍근(洪根)은 영진출이며, 상근(尙根)·문근(文根)·연근(演根), 광산 김상면(金相冕)의 처는 영보출이요, 규근(奎根)·성근(聖根) 목천 장태열(張台烈)의 처는 영희출이요, 병근(秉根)·경근(慶根) 양성이 청주 한원교(韓元敎)의 처는 영철출이며, 명근(明根), 평산 신봉조(申奉祚)의 처는 영유출이었다. 아! 부군의 수가 덕행에 따르지 못했으니, 이것은 분명히 공이 받은 운명이었을 것이다. 부군이 본디 실천해온 四덕(元亨利貞)의 바름과 六행(孝友睦婣任恤)의 독실함을 증대부가 훈계하고 대부께서 선고에게 가르쳤으며 선고가 불초에게 훈계하였으므로 불초가 더욱 오래되면 실전할까 염려하여 삼가 이와같이 기술하여 후예의 세훈을 삼게 한다. 효현손(孝玄孫) 병란(炳瓓) 삼가 기술함
 
1. 문헌 목록 〉17. 17世 〉11. <부정공>첨지공휘현보유사(僉知公諱顯普遺事)
1. 문헌 목록 〉17. 17世 〉13. <부정공>사복시정공휘정직가장(司僕寺正公諱廷直家狀)